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로마이단 혁명 (문단 편집) == 절정: 존엄의 혁명 == [[파일:external/i.obozrevatel.ua/609281.jpg]] (경찰의 발포에 숨진 시민들) [[http://life.obozrevatel.com/boiling/35401-kak-pogibala-nebesnaya-sotnya.htm|출처]]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4/49/Bodies_of_protesters_in_the_hotel_Ukraine_lobby._Clashes_in_Kiev%2C_Ukraine._Events_of_February_20%2C_2014-2.jpg|(경고) 총에 맞아 안치된 시신을 촬영한 사진이니 주의할 것.]] 흰 담요를 덮은 시위 참가자의 시신 주변 사방에 피가 낭자한 상황이다. 결국 사태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2014년 2월 19일 이후 야권과 정부간 협상도 성과 없이 결렬되고, 양측의 충돌은 갈 데까지 다 가버려 본격적인 무력 동원과 유혈 충돌로 확대되었다. 야누코비치 정부는 시위대의 도심 집결을 막기 위해 [[지하철]] 운행을 중지시켜 버렸다. 또한 키이우로 향하는 고속도로[[http://www.golos.com.ua/Article.aspx?id=318552|#]], 철도 등[[http://www.pohlyad.com/news/n/39052|#]]도 완전히 운행을 중지시켰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진압에 나선 정부는 시위 진압에 '''대놓고 총기를 발포하기 시작했다'''. 2014년 2월 18일-23일 사이의 "'''존엄의 혁명(Революція гідності)'''" 기간 동안 80명 이상의 시위대가 경찰의 발포로 사망했고, 특히 저격에 의한 사망자는 20명 이상이 집계되었다[* 이 당시 사망한 민간인 시위자 100명을 '천국의 100인(Небесная сотня)'이라고 부른다.]. 한국의 [[경복궁 광화문|광화문]]에 해당되는 마이단 광장은 위 사진과 같이 불탔으며, '티투쉬키(Тітушки, Titushky)'라 불리우는 정부가 고용한 폭력배 또는 사복경찰이 시위 가담 여부를 가리지 않고 시민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가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하지만 이는 시민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어 시위만 늘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우크라이나 전역에는 계엄령이 발령되었고, 정부는 군대를 동원할 계획을 검토했다. 내전과 다름없는 상태에서 학교 및 관공서는 휴교-휴업에 들어갔다. 주민들이 식량을 사재기하면서 마트의 재고는 텅텅 비었고, 길거리에서는 사람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정권 교체 이후 알려진 일이지만, 이때 야누코비치 정부는 군 부대를 진압에 투입하려 하였으나 군이 진압작전에 투입되면 사태가 악화되기에 폴란드 외무장관의 말에 의하면 '''바로 그 [[블라디미르 푸틴|푸틴]]이 전화를 걸어 군병력 투입에 반대'''했다고 한다. 사실 최소한의 정치적 상식이 있는 정치인이라면 시위대를 다짜고짜 유혈진압하면 사태만 심각하게 악화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시위대를 협상을 통해 달래기보다는, 군대를 동원해 '''총기'''로 유혈진압을 하겠다는 시점에서 이미 상식적인 판단이라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언론들은 보수 진보를 가리지 않고 비난을 퍼부었고 야권은 심판하겠다며 반발했다. 특히 야누코비치의 지지세력인 우크라이나 동부와 친러측에서도 지나치다고 비난을 하고 나섰다. 서방 측 역시 야누코비치 정부를 비난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윈터 온 파이어"를 보면 총기 발포는 도덕과 윤리를 떠나서 완벽한 자충수였다. 이미 이 시점에서 시위대는 의회로 돌파하는 행진에 실패하면서 해산될 위기에 처했고, 타이어를 태우면서 저항하던 상황이었다. 물론 이전처럼 버텨낼수도 있었지만, 집단발포를 하면서 사태는 급속도로 악화되고, 대통령은 밤에 헬기를 타고 도주한다. 이 와중에 우크라이나 사태를 둘러싸고 EU, 미국 및 나토 등 서방 측과 러시아 측의 의견대립이 격렬해지면서 이들이 각자 지지-지원하는 야권과 정부 모두 쉽게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 됐다. [[http://news.donga.com/3/all/20140220/61029336/1|참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4&oid=421&aid=0000697406|기사]] 2월 21일, 사태가 확산되고 사망자가 급증하자 [[독일]], [[프랑스]], [[폴란드]] 3국 외무장관의 중재하에 정부와 야권간 [[http://www.segye.com/content/html/2014/02/21/20140221004446.html?OutUrl=naver|타협안이 통과되었다.]] '''‘2.21합의(Agreement on the Settlement of Crisis in Ukraine)’'''으로 불리는 이 합의의 주요 내용은 2014년 이내 대선 실시와 야당이 참여하는 거국적 연립내각 구성으로 서방은 이 중재안으로 우크라이나 위기가 종식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야당과 시위대 내에선 '시간을 벌려는 정부의 꼼수'라며 반발하는 움직임이 있어 시위가 곧바로 끝날지는 미지수였다 그리고 결국 야누코비치 대통령과 야당 대표간 합의(대통령 권한축소를 골자로 한 2004 헌법 복귀, 거국내각 구성, 12월 조기 대선 등)에도 불구하고 시위대는 야누코비치 대통령 퇴진이라는 강경 입장을 고수한다.[* 출처: 주우크라이나대사관[[https://overseas.mofa.go.kr/ua-ko/brd/m_20850/view.do?seq=1072953&page=8|우크라이나 정세(2014년)]]] 2월 23일, 결국 이런 막나간 행동으로 우크라이나 전체가 들고 일어나 반야누코비치 시위대는 시위를 계속하여 [[키이우]]의 대통령 집무실을 점령했고, [[율리야 티모셴코]] 전 총리의 석방과 동시에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탄핵되었다. 즉 지지세력에게도 버림받았다. 같은 시각, 야누코비치는 동부의 거점 도시 [[하르키우]](러시아명 '''하리코프''')로 피난을 갔다. 의회에서는 전날 국회의장으로 선출된 원내 최대 야당인 조국당 소속 올렉산드르 투르치노우 의원을 임시 대통령으로 지명했다. 그래서 미국과 유럽에서는 이를 지지하였다. 한편 야누코비치는 하르키우에서 TV중계를 통해 "의회 결정은 불법이며 쿠데타 행위, 나는 합법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이며 물러나지 않겠다." 고 밝혔다. 이 부분은 러시아 정부의 논조와도 일치한다. 특히 러시아 정부는 2월 22일 서방 3국 외상이 중재한 협정이 야권에 의해 일방적으로 파기된 것을 들어 서방을 맹비난했다. 그 후 새벽에 동부 국경 [[도네츠크]][* 축구팬들에겐 우크라이나 최강 축구 클럽인 [[샤흐타르 도네츠크]]의 연고지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의 치안이 불안정해지면 샤흐타르같은 중상위권 강호가 유럽 무대에 나올 수가 없으므로 축구팬들의 이목이 이곳으로 집중되기도 했다. 참고로 샤흐타르의 홈구장 돈바스 아레나는 결국 경기장 일부가 포격당하고 현재 친러시아 반군에게 점령당했다. 따라서 샤흐타르는 임시로 연고지를 우크라이나 서부의 도시 [[르비우|리비우]]로 이전하게 된다.] 주의 공항에서 뇌물을 주고 국외 탈출을 시도하다 국경수비대에 걸려 실패하고 [[코렁탕|그를 호위하던 무장군인들과 함께 사라졌다고 전해졌다.]] 같은 날 의회에서는 동부 지역에서 사용되는 [[러시아어]]의 제2 공용어 지위를 박탈하는 안건이 통과되었다. 정확히는 우크라이나 국내에서 '''제2공용어 자체'''를 없애버린 것이다. 2012년 제정된 제2공용어법은, 지역별로 특정 외국어를 쓰는 소수민족의 비율이 10%를 넘기면 그 언어를 해당 지역 제2공용어로 인정하게끔 되어 있다. 물론 러시아어권의 혜택을 위한 법이었지만, 서부의 일부 헝가리, 루마니아인들도 이와 같은 혜택을 받았다. 이 법의 폐지 역시 동서부 구분 없이 이뤄진 것이지만 주 타겟이 러시아어권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 가령 러시아어만을 사용하는 '''공무원'''은 새로운 법에 의하면 당장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는 상당한 유사성이 있어 웬만한 시민은 거의 모두 우크라이나어/러시아어를 모두 사용할 수 있다. 2012년 당시에 법을 통과시키면 우크라이나어가 사라질것이라고 주장하는 친서방 야권 세력의 반발이 심했는데[* 실제 우크라이나에서는 러시아어만 알아도 적어도 일상생활에서는 크게 지장이 없다. 현재 러시아와 대립이 격화된 이후 러시아어가 공문서 등에서 우크라이나어로 점진적으로 대체되어 가는 추세다.] 친러세력에서는 그걸 그냥 무시했었다. 타협이라곤 없는 우크라이나 정치의 일면이다. 그러나 3월에 투르치노우 권한대행이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즈음에 집권여당이었던 야누코비치의 지역당마저 대통령을 축출하는데 찬성했고, 지역당 소속 의원 및 키이우 시장이 집단으로 탈당하는 등 전면적인 집권세력의 붕괴가 현실화되었다. 이후 지역당은 야권과 공조하여 야누코비치 축출 및 신정부 수립에 협조하였다. 이런 가운데 야누코비치와 대선 경쟁을 벌였다가 패배 후 구속되었던 율리야 티모셴코가 석방되고, 5월에 조기 대선을 치르기로 해 키이우 정가(政街)는 빠른 속도로 '포스트 야누코비치' 체제로 접어들었다. 2월 25일에 5월 선거를 위한 준비가 시작되었다. 티모셴코 전 총리도 후보로서 결격이 없음을 선거위원장이 천명했다. 그녀는 지난 22일 석방되었다. 한편, 우크라이나 경찰은 야누코비치 대통령에 대해 수배령을 내렸다. 공항을 통한 출국 실패 후 하르키우를 전전하던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경호원들에게 떠날 것인지 남을 것인지 선택권을 주었고, 남은 경호원들과 함께 3대의 차에 나눠타 러시아로 도망갔다고 한다. 그리고 3월 2일 러시아에서 기자회견에 나타났다. 지역당이 야누코비치 대통령을 배신자라 부르며 선긋기를 시도하고, 동남부 지지세력의 반발이 예상보다 시원찮은 것 등의 이유로 정권 탈환을 포기, 망명을 시도 중이라고 보는 분석이 있다. 그렇게 부패한 암군 야누코비치도 축출되었고, 혁명은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